공인본 남명증도가, 재조명 시급하다

박상국 “남명증도가, 最古” 주장
기존 ‘공인본=목판본’ 결정 잘못
목판아닌 금속활자본 특성 가져
남명증도가, 직지보다 138년 앞서
인정되면 세계 인쇄사 다시 쓸 것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진 왼쪽)와 삼성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진 오른쪽)의 모습. 공인본은 농담 차이가 많지만, 삼성본은 인쇄가 가지런하다. 초기 금속활자는 기술 문제로 가지런하지 못하고 조잡한 경우가 많다. 특히, 개인이나 지방 사찰에서 주조해서 한계가 있었다. 사진 제공= 박상국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진 왼쪽)와 삼성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진 오른쪽)의 모습. 공인본은 농담 차이가 많지만, 삼성본은 인쇄가 가지런하다. 초기 금속활자는 기술 문제로 가지런하지 못하고 조잡한 경우가 많다. 특히, 개인이나 지방 사찰에서 주조해서 한계가 있었다. 사진 제공= 박상국

고려, 最古 인쇄기술 보유국
1999년 미국 타임사는 지난 천 년 세계를 움직인 100대 사건을 선정하여 발표했는데, 1위가 145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찍어낸 ‘42행 성서’를 최대 사건으로 뽑았다.

금속활자는 지식정보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보급할 수 있는 3차 지식정보 혁명이다. 이후 유럽은 종교혁명, 시민혁명,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민주주의를 탄생시켰고, 오늘날 현대문명을 일으킨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1972년 프랑스 파리도서관 지하 수장고에 묻혀있던 〈직지〉가 박병선 선생에 의해서 발굴되어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는 책 전시전에 출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직지〉의 책 말미에 “1377년(고려 우왕)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보급하다”라는 간행 기록이 있어서 세계 인쇄사에서 공인을 받았고, 2001년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의 문헌에 나온 금속활자에 대한 기록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 고려가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사용한 문화민족이고, 책의 나라임을 세계만방에 입증하였다. 

당시 〈직지〉의 발견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하나의 쾌거이다. 그러나 사실 고려는 금속활자 발명국은 맞지만 사용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반 대중이 독서를 하기 위한 책의 간행이 아니라 특정집단과 국가에서 필요한 소량의 책을 인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751년)과 초조고려대장경과 의천대사의 교장(속장경),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우수한 인쇄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려는 불교나라로 우수한 인재가 동원되어 범종, 불상(철불), 향로, 당간지주 등 최고로 금속을 다루는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숙종 때는 송나라에 유학을 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건의에 따라 ‘해동통보’란 주전화폐(鑄錢貨幣)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을 바탕으로 고려인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최초 금속활자본
2015년 보조사상연구원 세미나에서 박상국 선생이 발표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남명증도가(공인본)’는 국내의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였다. 그리고 이 논문을 보완하여 지난해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간하였다. 경천동지할 세계 인쇄문화사를 다시 써야할 대사건이다. 1377년에 간행한 〈직지〉보다 138년 앞선 1239년에 간행된 것으로 책의 끝에 붙은 간기(刊記)에서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박상국 선생은 평생을 문화재청에서 재직한 전문위원, 문화재위원을 역임하였고 전국 사찰 소장 목판조사를 수행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의천(義天)의 교장(敎藏), 고려대장경 등의 진실을 밝힌 불교서지학의 최고 전문가이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동안 현존하는 13권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책 끝에 수록된 ‘최이(崔怡, 崔瑀 ?~1249)의 지(誌)’를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간행 발문으로 잘못 이해했음을 지적하였다. 이 지문이 목판본과 활자본을 구별하는 첫 번째 열쇠이다.   

그 내용 가운데 핵심 지문인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에 대해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보물로 지정할 때 “주자본(금속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겨”라고 해석했다. 그 이후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외 12종이 모두 목판본으로 해석되었다.

박상국 선생은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서 “중조주자본(重彫鑄字本)”의 해석은 “공인(工人)을 모아 주자(금속활자)로 다시 간행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때는 기해(己亥, 1239년)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 삼가 기록한다”라고 해석해야 함을 5명의 저명한 한문학자에게 해석을 의뢰한 것을 들어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6년에 문화재위원회에서 “최이(崔怡) 지(誌)”는 삼성본의 간행 발문이 아니라고 발표한 것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무신정권의 권력자인 최이가 써준 지문은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인쇄가 성공했기 때문이지, 주자본을 저본으로 다시 번각(飜刻, 원판의 책을 그대로 다시 새김)한 허접한 목판본 책에다 지문을 써주지 않았을 것이고, 최근에 최이의 발문은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간행 발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둘째, 삼성본(삼성출판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 나타나는 목판본의 특징과 공인본(공인박물관 소장)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 나타나는 금속활자의 특성을 대조 비교해가며 전문가 입장에서 명확하게 분석하여 지적하고 있다. 

“공인본은 금속활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주조 기술의 미비로 생긴 너덜이, 획의 탈락, 가필이 많고, 농담(濃淡)의 차이가 크다. 반면에 삼성본은 판면이 평평한 목판에서 인출(印出 )한 것이므로 농담의 차이가 없다. 다만 할렬(割裂, 목재의 결에 따라 발생하는 파괴현상, 목판본에서 보이는 특징)이 많이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박상국 선생은 전국 사찰의 목판경판을 조사하여 500여 책에 대한 문화재 지정 조사와 5만여 책에 대한 해외 전적(典籍) 조사를 주관한 국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전문가이다. 

원래 〈증도가(證道歌)〉는 중국 당나라 육조 혜능(慧能)대사의 제자인 영가 현각(永嘉 玄覺, 665~713)대사가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시로 읊은 운문(韻文) 형식(7언시)으로 총 267구의 선시집(禪詩集)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중국 송나라 때 남명 법천(南明 法泉) 화상이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찬송하여 기리는 송(頌, 문체의 하나)을 붙인 책이다. 이 책이 고려에 전해져서 1239년에 송나라 본(本)을 금속활자(주자본)로 다시 간행하였다(重彫鑄字本). 그 후 이 주자본(鑄字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목판본으로 번각(飜刻)한 판본이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대구 개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반야사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등이다.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목판본의 특징이 분명하게 나타나 목판본으로 분류되어 1984년에 보물758-1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12년에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나와 삼성본과 동일본이라 하여 보물758-2호로 지정되었다. 

박상국 선생에 의하여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문화재청에서 공인본을 삼성본의 후쇄본으로 핀단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힌 새로운 연구 논문이다. 목판본으로 보물 지정된 것이 잘못되었으니 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심의하여 진위를 밝혀달라는 내용이다.

새로 써야 할 세계 인쇄역사
문헌 기록에 있는 유물은 언젠가는 나타난다. 땅 속이든지, 바다 속이든지 역사의 현장으로 드러난다. 중국 청나라 말기 1899년, 왕의영(王懿榮)에게 한약재로 쓰이던 것이 갑골문자임을 우연히 알게 되어, 은나라 수도 은허(殷墟)가 발굴되고, 은(殷)나라가 중국의 역사 속에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의 〈직지〉도 그렇고, 신안 앞 바다 속에서 송나라 때 도자기를 실은 운반선이 침몰했다가 천 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1940년에 나타난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과 똑같은 책이 현재 경북 상주(상주본)에서 2008년 나타나 고서수집가 배익기의 수중에 은익되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나 유물을 찾고 발굴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다. 문화와 경제를 함께 발전시킨 선진국가가 일제히 문화강국을 지향하고 있다. 인류의 정신문화사는 책, 즉 인쇄문화가 주도해 왔다. 우리 민족은 책을 좋아하고 기록을 잘 하는 책의 나라 국민이다.

박상국 선생의 주장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금속활자로 밝혀지면 우리나라는 또 하나의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만방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종주국으로서 인쇄문화국의 자리를 확고히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서지학(書誌學)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서지학의 수준이 목판본인지, 금속활자본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금속활자는 금속세공기술, 서법예술, 서각예술, 종이제작 기술, 먹(번지지 않는 잉크)제조 기술, 거푸집 만드는 흙과 불을 다루는 기술, 등 다방면의 종합적인 전문기술과 엄청난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당시 도자기(陶瓷器) 기술과 함께 최첨단 기술의 총아였다. 

당시 금속활자본은 초창기 기술 문제로 조잡할 수밖에 없다. 조선 초기 태종 이후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왕명으로 계미자(癸未字)를 국가가 주조(鑄造)하였고, 세종의 갑인자(甲寅字)에서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활자가 탄생했다. 그러나 개인이나 지방 사찰에서 주조한 활자본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50권,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고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 기록에만 되어 있고, 실제로 책이 없지만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보물로 지정되어 현물로 존재하고 있고 있기 때문에 문화재청이 검증하고 판결을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제 국가와 학계에서는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박상국 선생의 주장대로 금속활자본인지, 목판본인 삼성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후쇄본인지를 다각적 분야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연구하고 금속활자본의 진위를 검증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불교계는 관계기관이 연계하여 또 다른 직지의 발견을 위하여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금속활자본 진위를 밝히기 위한 공론화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 더불어 국민과 불자들의 관심이 요청된다.

<원본출처>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01670